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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발전 이끈 실용주의 한계 도달, 새 가치 선택의 기로에

자오후지

2017.02.06

전직 黨校 교수가 쓰는 중국공산당 이야기
당의 이념

흑묘백묘론을 내세운 덩샤오핑은 중국을 다시 실용주의 국가로 변모시켜 개혁·개방을 이끌었다. 사진은 덩 탄생 110주년을 하루 앞둔 2014년 8월 21일 광둥성 선전 롄화산에 세워진 그의 동상 앞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는 모습. 덩이 1992년 남순강화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광둥성의 한적한 어촌이었던 선전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도시로 탈바꿈했다. [중앙포토]

마오쩌둥(毛澤東)의 다섯 권의 저작 중 제1권 제1편은 ‘호남 농민운동에 관한 고찰 보고’다. 이 글에서 모든 정치 결정은 현실에서 출발해야지 어떤 이론이나 이념 내지 어떤 기존의 모델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즉 ‘실사구시(實事求是)’가 마오쩌둥 정치철학의 기반인 점을 볼 수 있다. 정권을 잡기 전까지 마오쩌둥은 그 어느 지도자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다. 마오쩌둥은 ‘도시에서 무장 폭동으로 정권을 탈취한’ 소련의 경험을 모방해야 한다는 중국공산당 지도층의 지배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현실에서 출발해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중국식 모델을 개발했다. 그는 중국을 다시 통합해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립하고자 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후 마오쩌둥은 정치적 낭만주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낭만주의는 정치 이상주의로 치달았으며, 정치 이상주의는 결국 극단주의로 귀결돼 온 나라를 곤경에 빠지게 했다.

유교문화, 마르크스주의, 군사문화는 마오쩌둥 정치이념의 기반이었다. 이 세 가지 문화자원은 전쟁과 준전쟁, 열악한 생존환경, 열세 대 강세 등의 환경 속에서 결합되고 강화돼 마오쩌둥의 정치가치 지향을 형성했다. 우선, 흑백논리를 극단화했다. 마오쩌둥은 모든 사물을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로 구조화했다. 예를 들어 자산계급과 무산계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절대적인 대립 등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정신적 힘에 대한 집착이다. 혁명대오의 구성원들은 비공리주의적인 정신적 힘으로 지극히 열악한 환경을 극복했다. 정권을 잡은 후에도 마오쩌둥은 여전히 정신적 힘에 집착하면서 전체 사회 구성원들에게 비공리주의를 강요했다.

게다가 마오쩌둥 정치이념에는 이상주의 지향이 가미됐다. 2만5000리 장정에서 살아남은 3만 명으로 수백만의 국민당군을 이겼던 것이다. 실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 기적은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의 이상주의를 낳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오늘의 현실보다 내일의 이상에 더 비중을 두면서 정신적 힘으로 내일의 이상을 오늘날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고 결과적으로 나라를 파탄의 변두리까지 몰고 갔다.

마오쩌둥 정치철학 기본은 실사구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춘절을 앞둔 지난달 24일 허베이성의
더성촌을 방문해 주민들에게 새해인사를 하고 있다.
시진핑 정권은 ‘어제의 것’과 ‘오늘의 것’ 사이 취사선택에
고민하고 있다. [신화통신=뉴시스]

마오쩌둥의 이상주의는 또 이념주의를 낳았다. 안전과 복지라는 현실적 가치보다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는 이념적 가치에 더 집착한 것이다. 정치학에서 나라 관리의 두 가지 정책 목표는 안전과 복지다. 안전이라는 것은 이 세상은 무정부 상태로 강한 자가 판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나라가 강해야만 안전하다는 논리다. 복지라고 함은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에게는 안전과 복지라는 현실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는 이념적 가치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안전과 복지를 이룰 수 있더라도 자본주의 방법은 안 된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의 심복이던 장춘차오는 “사회주의 잡초를 심더라도 자본주의 싹을 키워선 안 된다(寧要社會主義的草, 不要資本主義的苗)”는 극단적인 구호를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이념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주의로 치달았다. 국가의 이상과 이념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었고, 이에 따라 집단과 개인의 이익은 당연히 국가 이익에 복종해야 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마오쩌둥의 정치이념과 시행착오에 대한 반성, 선진국과의 엄청난 발전 차이에서 오는 압력, 경쟁 속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밖에 없는 등 개방된 통치환경에서 오는 압력 등을 거대한 동력으로 변환시켰다. 그는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黑猫白猫·흑묘백묘)’라는 실용주의 이념을 제기해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었다.

1970년대 말 중국은 덩샤오핑의 현실주의, 사실주의, 조합주의 정치이념에 의해 개혁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해 4개 현대화(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 실현을 최고의 정책 목표로 설정하고 본격적인 경제 개혁을 시작했다. 197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중국의 경제체제는 다섯 단계를 거쳐 개혁되어 왔다. 즉 1978~88년 계획경제체제 내의 상품경제 부분적 도입시기, 1989~91년 새장경제 주장과 시장경제 비난시기, 1992~97년 새장경제론에서 시장경제론으로의 과도기, 1997~2002년 시장경제 전면 도입기, 2002년~현재 시장경제 확립기다. 이는 세 가지 권력관계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국가와 개인 사이의 권리 재분배다. 개혁 전 국민들의 모든 선택권은 국가에 집중돼 있었으므로 국민은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있어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다. 개혁 후 선택권이 국민들에게 돌아옴으로써 국민은 자기 생활의 주인이 되고 있다.

둘째, 정부와 기업 사이의 권력 재분배다. 개혁 전 기업은 단순한 생산조직으로 어떠한 경영권도 없었다. 개혁 후 경영권이 정부로부터 기업으로 이전돼 기업은 명실상부한 경영의 주체로 변신했다.

셋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권력 재분배다. 개혁 전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연장선으로만 존재하였으나, 개혁 후 정책결정권이 점차 하부 조직으로 이전돼 ‘시장경제 하에서는 정책결정 단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는 원칙이 관철되기 시작하고 있다.

흑묘백묘론으로 실용주의 부활

국가 부속물로만 존재해 왔던 국민들은 독립 인격을 갖춘 시장경제의 주인으로, 단순한 생산조직으로만 존재해 왔던 기업은 경영권 내지 재산권을 부여받음으로써 독립적인 경영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중앙정부 권력의 전달자로만 존재했던 지방정부는 지방 이익의 대표라는 2중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민개인·기업·지방정부는 활력을 가지게 됐고 그 활력은 개방으로 얻어진 자금·기술·시장 등과 결합하면서 천지개벽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장쩌민은 천안문 사태 후 보수 강경세력들의 시장경제 반대 주장을 극복하고 시장경제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외곽 투자에 의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시장경제 도입으로 얻어진 경제성장과 함께 생겨난 실직 노동자, 도시로 진출한 농민들의 이익 보장, 그리고 경제성장을 이끌고 있는 기업인들의 이익 보장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즉 기업인, 노동자, 농민들이 공생하면서도 상충하고 있는 이해관계 조절(三個代表·3개 대표)을 필수과제로 제시하고 10여 년에 걸친 임기를 마쳤다.

장쩌민 시대를 시장경제 제도화와 경제 성장의 시대라고 한다면 후진타오(胡錦濤) 시대는 민생 개선과 균형발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후진타오 시대에는 국가 발전 목표를 선진국과의 발전 격차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실직·의료·노후 등 민생 개선에 주력하며 성장일변도로 생겨난 환경 파괴, 빈부 격차, 도농 격차, 지역 격차를 줄이는 데 주력했다.

이 같은 변화는 실용주의 가치 지향에 힘입은 정책들로 가능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변화는 새로운 창조 과정이 아니라 선진국 내지 한국과 같은 앞서간 개발도상국에서 무언가를 배워 오는 단순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에 이르러 이런 과정은 끝났고 기본 가치의 새로운 선택을 재촉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본 가치가 뚜렷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변화는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용주의 이념은 이미 한계에 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 인식하고 정리해 상당수의 인류 공동체들이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는 가치는 자유주의 그리고 공동체주의 등일 것이다. 자유주의는 선진국과 신흥공업국들에 보편화된 기본 가치다. 시장경제를 선택한 이상 시장경제가 내포하고 있는 자유, 평등과 같은 이념은 거절한다 해서 거절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는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많은 부정적인 것들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적 가치 기반한 제도 갖춰야 대국

현재 시진핑(習近平) 정권은 ‘외래의 것’과 ‘본토의 것’, ‘어제의 것’과 ‘오늘의 것’의 취사선택에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 지금으로서는 불투명하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즉 중국이 선택할 기본 가치 지향은 시장경제와 맥을 같이할 것이며 또한 시장경제의 무한경쟁으로 인한 문제점을 보완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결과만이 아니다. 즉 우수하고 선진적이라고 보이는 것들을 선택해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발전이란 시간적 측면에서는 전통의 승계와 창조의 결합이고 공간적인 측면에서는 우수한 것에 대한 학습(모방이 아닌)과 창조의 결합이다.

덩치가 크다고 대국인 것은 아니다. 대국은 국가 규모, 문화적 가치 그리고 그 문화적 가치에 기반한 제도를 갖출 때 대국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영국·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대국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국가 규모로 말하면 중국은 당연히 대국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적 가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아직 석연치 않다. 따라서 현재 중국의 정치제도를 성숙하고 완성된 제도라고 하기는 어렵다.

인류는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고 있다.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테러리즘의 확산 등 위기의 극복은 정부들 사이의 긴밀한 협력을 요청하고 있다. 중국은 그런 시대의 부름에 응해 동서를 초월하는 가치와 제도를 생산해 낼 때 진정 대국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중국은 그런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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