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상단으로이동

[대전환기의 설계자들] 독일 제국을 일으켜 세운 거목 비스마르크 “능수능란 외교로 통일 이루고 통일 이후엔 힘을 절제했다” - 이종헌 “트럼프에게서 비스마르크를 느낀다”, 이광재 “남∙북 관세동맹 검토해보아야”

관리자

2019.07.08

<편집자 주>

대전환기다. 냉전 70년 만에 탈냉전과 미국 단일 패권시대가 왔고, 그 이후 30년 만에 패권 질서 재편의 시기에 들어섰다. 여기에 4차 디지털 기술혁명이 표준 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의 권력이동이 가로 세로축으로 교차하면서 세계적 수준에서 격랑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이런 대변동기에 야수의 먹잇감이 되었다. 전장(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되거나 식민지가 되거나 분단이 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사드를 빌미로 한 중국의 위협, 강제징용자 문제에 대한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가 한국이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한다. 새로이 열리는 위기의 징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시대의 성패도 갈릴 것이다. 크게 보고 현명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사에는 전환기적 상황 속에서 국가를 일으켜 세운 거목들이 있다. 여시재는 그들로부터 이 대전환기를 헤쳐나갈 슬기와 지혜를 얻고자 한다. 이번 순서는 150년 전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다.


38개 지방 소국을 독일제국으로 통일시킨 비스마르크는?

비스마르크는 2류 국가였던 프로이센의 재상으로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쟁쟁한 주변 강대국의 압력과 견제를 뚫고 통일을 달성한 인물이다. 1862년 비스마르크가 집권하던 때 독일은 명목뿐인 연방 국가였고, 프로이센은 이 연방을 구성하는 38개 영방(중세 이후 독일에서 지방 영주가 주권을 행사하던 지방 국가)들 중 하나였다. 18세기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시절 전성기를 구가했던 독 연방은 19세기 중엽 프로이센 중심의 북부 독일과 오스트리아 중심의 남부 독일로 분열되어 있었다. 38개 영방은 합종연횡과 각자도생을 도모했다. 이런 시기에 프로이센의 재상으로 등장한 사람이 비스마르크였다. 비스마르크는 집권 불과 9년 후인 1871년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모든 영방을 통합시켜 현대 독일의 모습을 갖춘 독일제국을 탄생시켰다.

비스마르크는 우리에게도 꽤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총리 취임 연설에서“오늘날의 중대한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오로지 철과 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이 말로서 ‘철혈재상’으로 불린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그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실제는 능수능란한 현실주의 외교 전략가였다. 그것이 독일제국을 만들어냈다. 통일 후 그의 외교 전략의 중심은 ‘힘의 절제’로 이동했다. 통일 과정에서는 전쟁을 했지만 이후에는 ‘힘의 균형’을 중시했다. 그리고 그가 물러난 후 독일은 패권주의로 치달았고 결국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다선외교’ ‘이중외교’가 핵심 요인

비스마르크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 6월 27일 여시재 이광재 원장이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TCS)’ 이종헌 사무총장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이 총장은 외교관인 동시에 비스마르크 전문가다. 인터넷 닉네임을 ‘비스마르크’로 쓸 정도로 비스마르크 연구에 빠져 살아왔다.

이광재 원장과 이종헌 사무총장 모두 비스마르크 특유의 ‘다선외교’ ‘이중외교’야말로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었다고 했다.

이종헌 사무총장은 “비스마르크는 주변 국가들이 최소한 독일 통일을 막아서지는 않도록 외교를 펼쳤다”며 “비스마르크 외교의 특징을 철저한 현실주의로 꼽기도 하는데, 철저한 국익 우선의 관점에서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이 그때그때 국가의 이익과 목표에 따라 유연하게 외교 전략을 펼쳤다”고 말했다.

또 그는 “우리의 국익을 지키면서 동시에 주변 국가와 유연한 외교 관계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상대 국가의 상황을 면밀히 이해해야 하는데,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력과 여기에 더해 외교적 상상력이 겸비된다면 좋은 외교가 나올 수 있다”며 “비스마르크가 지주 출신에다 직업 외교관 경험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외교를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세상의 흐름을 포착해내는 뛰어난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종헌 총장은 이어 “21세기 대한민국 또한 미∙중∙일∙러 등 주변 강대국의 한가운데에 놓인 상황에서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 등에 쉽게 기울지 않고 철저하게 국익을 우선하는 관점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국가 이익을 통찰하고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며 “현대 외교의 대가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가 비스마르크 외교의 계승자로서 중국을 미국 쪽으로 끌어당김으로써 미국의 국가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광재 원장은 “다선 외교를 펼치려면 먼저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수집하고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특히 미∙중∙일∙러 등 세계 최강의 경제∙군사 대국들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상황을 고려할 때 가칭 ‘외교정책 전략처’ 같은 기구를 국회나 정부 산하에 설치하여 미중일러와 EU를 포함한 주요 국가들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면밀히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종헌 총장은 “트럼프에게서 비스마르크를 느낀다”고 했다. 그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빠르게 판단해 현실 속에 적용하는 것이 다선 이중외교”라며 “나는 트럼프가 그 계승자라는 생각까지 한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 미국에 등장한 네오콘이 신정정치를 연상시킬 정도로 가치 중심이었다면 트럼프는 그야말로 현실 속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는 ‘America First’야말로 현대판 다선 이중외교의 표현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원장은 “국익이라는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면서 “세계 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역사에 대한 학습과 안목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 영입하며, 주요국의 싱크탱크들을 한국에 유치하여 서로의 입장을 배우고, 네트워킹과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우리가 외부를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를 외부에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며 “정부가 해외 핵심 싱크탱크 지사를 서울에 유치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철도 도로 연결 넘어 남북 FTA까지 가야”



비스마르크가 총리가 되기 전인 28년 전인 1834년, 프로이센은 우월한 경제∙군사력을 바탕으로 북독일의 여러 지역 영방국가들을 경제적으로 한데 묶는 지역경제연합체인 ‘독일 관세동맹(zollverein)’을 창설하여 1871년 정치적·군사적 통일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아울러 관세동맹에 가입한 독일 영방국가들의 산업화, 경제적 근대화를 촉진시켜 경제 대국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비스마르크는 이 관세동맹을 기반으로 연방 내 통합성을 유지하면서 통일 기반을 강화시켰다.

이광재 원장은 “남한과 북한도 독일 관세동맹과 같은 경제적 연계와 연합 노력이 필요하며, 가령 남북한 FTA 체결을 통해 미래 경제 공동체로 가는 계기를 확보하고, 또 북한을 글로벌 경제 권역에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참여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21세기 북한판 신사유람단을 조직하여 북한의 학자, 관료들이 직접 글로벌 경제의 변화를 관찰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이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기존 틀로는 북한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힘들기 때문에 동북아 각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참여하는 가칭 ‘북한개발전문은행’의 설립 등의 방안도 적극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종헌 사무총장은 “1990년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후 비로소 유럽 통합도 힘 있게 진행될 수 있었듯이, 남북한 통일이 동북아 각국의 이익을 해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동북의 공동 번영과 평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비스마르크 사후 전쟁으로 질주한 독일

복독일연방의 맹주였던 프로이센과 수장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 덴마크 (1864년) 오스트리아 (1866년) 프랑스(1870년)와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불사했지만, 통일을 이루고 난 뒤에는 20여 년 간의 유럽 평화 체제를 주도했다. 그러나 1888년 즉위한 빌헬름 2세가 적극적인 팽창주의를 천명하면서부터 비스마르크의 외교에 기반한 평화 노선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1890년 비스마르크는 결국 해임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난 15년 뒤에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비스마르크의 사후 세계 제1차 대전과 2차 대전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다시 한번 분열을 극복하고 동서독 통일을 이룩한 이래 독일은 통합된 유럽의 중심 국가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70여 년 간의 장기 평화체제를 이끌고 있다.

그는 “비스마르크 외교의 본질 중의 본질은 힘의 절제”라며 “독일 통일 과정에서는 세 번의 전쟁을 벌였지만 통일 후에는 세력균형을 중시하면서 평화 관리자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는 “이것이 독일제국을 경제공동체를 넘어 정치공동체로 가는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요인”이라고 했다.

“작은 통일이어야 주변국 우려 불식”

이광재 원장은 “비스마르크는 다선 외교와 함께 ‘소독일주의’라 불린 작은 통일론을 주창하고 실천에 옮겨 주변 강대국의 우려를 불식하고 통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남북한이 합치고 중국과 러시아 접경에 있는 한인까지 포함하면 8000만~8500만 명 정도로 독일 같은 나라가 동북아시아에 출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통일을 반대하고 견제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원장은 “남북통일이 동북아 각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하고, 실제 공동 이익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남북이 통일되면 각국이 바다로 육상으로 사통팔달할 수 있고, 이것은 곧 공동 번영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중∙일 3국이 에너지를 공동 구매하는 것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국제 철도여행 요금을 대폭 할인하여 수학여행 등 인적 교류를 활성화는 방안 등은 각국이 합의만 하면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들”이라며 “공동의 작은 실천들을 통해 상호 신뢰를 확보하고 그를 바탕으로 다자간 안보체제로 진화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총장은 “내가 일하고 있는 한중일 3국 협력사무국의 주요 활동 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인적∙문화적 교류 프로그램이다. 예컨대 한해 동안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 중 절반이 한국과 중국 사람들이지만 양적 교류가 늘어난 것에 비해 상호 이해가 깊어지지는 못한 것 같다”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우호적 관계를 증진할 수 있는 다양한 접근과 활동이 활성화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광재 원장은 “비스마르크를 오늘날 한반도로 다시 불러낸다면 첫째, 미∙중∙일∙러를 상대로 한 다선외교, 둘째 남∙북한판 관세동맹, 셋째 주변 국가들의 우려와 경계를 염두에 둔 작은 통일론, 넷째 주변 국가와 더불어 진화해 가는 지혜를 주장하고 실천할 것 같다”고 했다. 이 원장은 “그리스와 로마, 싱가포르처럼 당대의 경제와 문명을 이끌었던 반도 국가들처럼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인류 문명의 교량이 되길 기원한다”고 했다.

[대전환기의 설계자들] 현실주의 외교 전략가 ‘비스마르크’

[대전환기의 설계자들] 이종헌 TCS 사무총장이 말하는 비스마르크 리더십


< 저작권자 © 태재미래전략연구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