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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인사이트] “구글·페이스북·알리바바 자체가 ‘국가’인 시대” 글로벌 거대기업만을 담당하는 ‘기술(Tech) 大使’ 만든 덴마크

이상훈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 부원장)

2019.04.05

2019년 3월 22일 서울 스퀘어 ‘WEWORK’에서 주한 덴마크 대사관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해 강연 중인 캐스퍼 클링게 기술대사(왼쪽) 및 토론회 모습

駐在하는 곳은 실리콘밸리와 베이징

2019년 3월 21일 덴마크 서울 대사관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다. 대사는 토마스 리만. 한글로 쓰인 그의 명함은 평범했다. 그곳에는 또 다른 대사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기술 대사(Tech Ambassador)’ 직함을 가진 캐스퍼 클링게(Casper Klynge)였다. 그의 명함에는 사무실 세 곳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코펜하겐과 함께 실리콘밸리, 베이징이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주재 대사 등을 지낸 덴마크의 베테랑 외교 관료다. 2017년 11월 덴마크 정부는 그를 기술대사로 선발해 실리콘밸리에 파견했다. 머지않아 베이징에도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코펜하겐, 실리콘밸리, 베이징 세 곳을 근거지로 하되 서울, 싱가포르를 비롯한 세계의 기술 허브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한다. 업무 대상은 미국이나 중국, 한국 같은 정부가 아니라 구글, 페이스북, 알리바바처럼 세계로 가지를 뻗은 글로벌 거대기업들이다. 업무 목표는 물론 덴마크의 국익이다.

만찬 다음날 열린 3월 22일 토론회에는 디지털이나 혁신 분야 한국 전문가들뿐 아니라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 전문가들, 그리고 서울에 주재하는 다양한 국가의 주재관들이 참석했다. 클링게 기술대사는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IT 기술기업의 경제력은 점점 증대하고 있다. 예컨대 애플의 연간 매출액은 덴마크의 GDP와 유사한 수준이다. 이 기업들의 막강한 경제력은 정치적 영향력으로 이어지며, 이는 한 국가의 영향력과 맞먹을 정도가 됐다. 10년 내에 기술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지을 것이다. 전 인류가 누려야 할 기술의 혜택을 거대기업인 승자가 독식할 위험성이 있다. 전통적 의미의 거버넌스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국가가 이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공공과 민간의 관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규제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다. 기술분야 역시 자체적인 규제가 어려울 것이다. 국가, 국제기구, 산업계 모두 함께 논의하고 일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정보통신기술은 이전의 어떤 기술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빨리 변화시켰고 그 변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불과 몇십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기술개발이 디지털을 기반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전 세계가 즉각적이고 범지구적이며 여과되지 않는 정보의 소통과 소비, 여론과 사회의 형성에 직면하게끔 만들고 있다. 이와 더불어 IT 기술기업들도 역사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거대하게 성장하고 있다.

토마스 리만 주한 덴마크 대사의 명함(위)과 캐스퍼 클링게 ‘기술대사’의 명함(아래). 클링게 대사의 사무실이 실리콘밸리, 코펜하게, 베이징으로 표시되어 있다.

1개 글로벌 대기업이 작은 국가 10여개 합친 것보다 영향력 커

미국의 국제관계 전문가 Parag Khanna에 따르면, 세계 유수의 기술기업이 성취한 국제적 영향력 및 경제력은 작은 국가 10여개를 합친 것보다도 크다고 한다. 2017년 애플의 현금자산은 2615억달러였다. 이를 뛰어넘는 GDP를 생산하는 국가는 전 세계 모든 국가의 3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앞으로 애플이나, 페이스북, 아마존, 알리바바 같은 특정 기업의 현금 자산이 글로벌 톱10 국가들의 GDP에 육박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이들 글로벌 거대기업들이 갖는 국제적 영향력도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 단지 비즈니스 분야만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글로벌 대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거대기업들은 환경이나 온난화, 지속가능성처럼 글로벌 이슈에도 점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16년 미국의 외교 전문지인 ‘Foreign Policy’는 구글의 지주회사인 Alphabet의 CEO인 Eric Schmidt에게 ‘올해의 외교상’을 수여한 바 있다.

애플, 페이스북, 알리바바, 아마존 본사 사진

덴마크 이어 프랑스도 ‘디지털 대사’ 임명

기술의 혁신적 발전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지각변동은 국가 단위의 외교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첫 적응과 변화 사례가 덴마크다. 덴마크 정부는 실리콘밸리에 대사를 파견하면서 “기술에 대한 접근이 균형감 있고 인간중심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캐스퍼 클링게는 ‘기술 대사’라는 직함을 가진 세계 최초의 사람이다. 2017년 11월 프랑스 정부가 이를 벤치마킹 해 ‘디지털 대사(Ambassador of Digital Affairs)’를 실리콘밸리에 파견했다.

기술대사를 파견한 덴마크 정부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토마스 리만 주한 덴마크 대사는 얼마 전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4차 산업혁명 준비가 미흡하면 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위험에 처하게 된다…. 국가 처럼 성장한 글로벌 기업이 미치는 영향에 대처해야 한다. 테크 대사의 업무는 기업과의 우호증진이다.” 기업을 국가 지위로 격상시켜 국가간 외교수준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다.

거대기업들이 책임의식 갖도록 촉구하는 의미도

클링게 기술 대사는 AI, 딥러닝, 바이오테크, 유전자변형 등이 단순히 상업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생활에 다양한 형태로 뿌리내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각국 정부가 이와 같은 이슈를 주도하고 있는 거대 기술기업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여 그들이 제자리를 찾고 그들의 영향력 만큼 책임의식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 국제기구, 시민사회 및 기술기업 간 강력한 협의체를 구성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보안, 부패, 이동편의 등은 물론 전 지구적 어젠다에 기술이 활용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에 파견된 프랑스 디지털대사와 덴마크 기술대사 모두 IT 등 기술기업과 협력하고 자국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임무를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덴마크 기술대사는 거대 기술기업에게 상대국 정부와 동등한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기술 대사’ 파견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거대 기업들을 직접 파트너로 한 기술 외교다. 둘째는 글로벌 기업들이 각 국가의 노동과 복지, 정치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판단해 대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미 국가 수준으로 성장한 글로벌 대기업들의 질주를 막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덴마크 기술대사 사례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정치·경제·사회 등 제반 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요구한다. 우리는 18~19세기 산업혁명으로 야기된 사회경제적 대변혁과 유사한 대전환기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정치외교의 무대에서 기술의 혁신, 개발, 집약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기술허브도시가 독자적인 외교주체로서 이전에 국가가 수행했던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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