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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인사이트] 나우만 등 6개 재단이 정책 통합의 원천 - 비주류도 국가리더 되는 시스템 구축

황세희

2018.10.26

2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은 전쟁 과오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전후 유럽통합의 중심적 역할을 굳건히 해왔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창설해 오랜 경쟁자였던 프랑스와의 안정적 경제 협력을 이끌어 낸 후 유럽연합의 구심점으로서의 존재감을 점점 키워가고 있다. 철저한 친 서방 외교도 전후 독일을 이끈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독일은 트럼프 정부의 ‘미국우선주의’에 대체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냥 따라갈 수 만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 5월 메르켈 총리는 ‘유럽인들은 우리(유럽)의 운명을 직접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트럼프가 NATO를 흔드는 데 따른 대응이었지만 전후 독일 총리 중 이렇게 분명하게 미국에 대한 입장을 밝힌 적은 없었따. 메르켈은 8월 18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해 온 ‘노르트스트림 2 가스관 프로젝트’를 둘러싼 양국 협력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대내적으로는 난민 문제로 인한 지지률 저하를 겪고 있으나 유럽 중심의 유럽을 구축하기 위한 메르켈 총리의 외교적 행보는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독일 정치의 중심, 비주류 출신인 메르켈 총리

메르켈 총리는 독일 정치 시스템의 유리천장을 깬 대표적인 인물이다. 메르켈은 동독에서 자랐고 이혼도 했던 여성이다. 비주류의 조건을 모두 갖췄다 할만하다. 정치 리더로 성장하기에는 성장 배경이 미흡했다. 그런데도 전후 최장인 4연임에 성공했다. 21세기 독일의 정치를 거론할 때 이제 메르켈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메르켈의 성공은 개인 메르켈의 성공일 뿐만 아니라 개방성과 분권을 특징으로 하는 독일 정당 정치의 산물이기도 하다. 연방제 국가인 독일은 관료 양성 과정 전반 에 있어 정당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공무원의 당적 보유도 제하이 없다. 16개 지방정부가 고도의 자치권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분권형 연방국가를 구축하고 있으며 역대 총리가 대부분 지방정부의 주요행정관료 출신이었다. 초대 총리인 콘라드 아데나워는 쾰른시장을 지냈고 동방정책으로 유럽의 데탕트를 촉발한 빌리 브란트는 서베를린 시장을,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총리는 라인란트팔츠 주 총리를 역임하였다. 주요 지도자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특정 지역이나 학벌이 두드러지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정치 엘리트의 대부분이 정당을 통해 충원되고 양성되는 독일 정치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아데나워 재단은 70여개국에 사무소 운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미성숙한 민주주의 토양 속에 나치 독재가 가능했다는 반성을 바탕으로 국민 대상의 민주주의 소양 교육이 중시되었다. 각 정당에 소속된 정당 재단은 이러한 민주주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주요 정당의 6개 정당 재단은 소속 정당의 연방의석 획득 상황에 따라 국가지원금을 요청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민주주의 교육 이외에도 정책연구를 수행한다. 이들은 또한 국제협력에도 힘쓰고 있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한스 자이델 재단,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한국에도 대표부를 두고 있다. 기독교 민주당의 콘라드 아네나워 재단(KAS)의 경우 민주주의, 법치주의, 사회적 시장경제 발전을 지원하며 전세계 120개 국 70여 개 이상의 해외 사무소에서 다양한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나우만 재단은 세계 60여개국에서, 유권자, NGO 활동가, 학계, 경제 및 정치계 인사들, 정책결정자 등을 대상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정책을 조언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정당 재단의 존재는 안정적인 정치지망생 양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사이에 청년당원으로 정당정치에 입문하여 고위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모든 과정에서 정치 엘리트는 정당과 함께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나우만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를 맡고 있는 크리스티안 탁스 박사는 정당 재단들이 중립적이고 개방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나우만 재단의 경우, Gummersbach 시에 위치한 재단 연수원에서 3일, 1주, 10 일, 2주 단위 등 다양한 기간의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은 일반 시민에게 열려 있고 나우만 재단의 자유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젊은이들이 적극 참가한다. 이 센터에서는 FNF 국제 리더십 아카데미를 운영하여 각국에 있는 나우만 재단 대표부의 직원들이 모여 교육을 받고 교류를 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7개의 지역 사무소가 있으며 각 사무소에서는 2 시간, 반나절, 1 일 단위의 다양한 워크숍을 통해 정치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정당 재단은 재정과 조직 운영에 있어 독립성을 유지한다. 독일의 정당재단은 정당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조직이다. 각 재단의 재원은 연방 정부로부터 나온다. 정당으로부터는 어떠한 재정 지원도 존재하지 않으며 일반 시민 및 당원들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당을 지원하고 있다. 크리스티안 탁스 박사는 나우만재단이 싱크탱크이면서도 한국국제협력단(KOICA)처럼 국제협력을 지원하는 기관 간 브릿지의 역할 또한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당 재단을 통한 인재 양성은 정당이 주도하는 의회 민주주의를 굳건히 하는 토양이 되었으며 이는 독일 통일과정에서도 정당이 사회적 합의를 수렴하고 동독 주민들의 통합을 도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독일 통일 당시 통일 방법론을 둘러싸고 각 정당들은 상이한 입장이었다. 정당들은 각기 통일 방안을 걸고 1990년 3월 동독지역 인민의회 선거를 치렀다. 이어 통일 이후인 1990년 12월 독-서독 통합 총선을 통해 독일 전주민의 추인을 받았다. 독일 통일 과정의 정당 역할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고용노동연수원의 송태수 박사는 독일 정당이 각기 자신의 통일 방안을 제시하고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지지에 따른 판단을 거침으로써 통일 독일 체제가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통일 달성 과정에서 동서독 정당의 협력과 통합 등의 정치 활동은 동서독 주민 들의 통일 방법에 대한 의사를 대변함으로써 정치적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통일 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한 것이다.

협의민주주의의 핵심, 앙케트 위원회

아울러 독일의 의회민주주의를 지속하는 협의체로 앙케트 위원회(Enquetekommission)의 존재는 주목할 만하다. 앙케트 위원회는 의회에서 특별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설치ㆍ운영되는 특별 분과 위원회를 뜻한다. 특정 이슈에 대한 공감대를 도모하기 위해 연방 의회 및 주의회에 설치된다. 연방이나 주 정부는 앙케이트 위원회의 실무진을 구성하여 사회적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한다. 독일 전후 정치의 역사적인 논의들은 앙케이트 위원회를 통해 공론화 과정을 거쳤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합의로 정착되었다. 대표적인 앙케이트 위원회였던 ‘사회주의 통일당 독재의 귀결과 과거청산(1992-1994년 실시)’, ‘독일 통일과정에서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의 유산 극복(1995-1998년 실시)’은 장기간의 토론을 통해 동독 사회주의 과거를 청산하고 통일 독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2000년대 이후에도 ‘지구화와 자유화 속의 지속가능한 에너지 공급 (2000년-2002년 실시)’, ‘인터넷 및 디지털 사회 위원회(2010년-2013년 실시)’, ‘성장, 번영, 삶의 질 - 사회적 시장 경제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와 사회 진보를 위한 길 위원회 (2010년-2013년 실시)’ 등을 통해 사회 변화로 제기된 주요 의제들을 토의해 왔다. 2018년부터는 ‘인공 지능 - 사회적 책임과 경제적 잠재력’이라는 주제의 위원회가 활동 중이다. 이 위원회는 2020년 종료 예정이다.

민주주의 소양 교육이 민주주의 위기 극복의 열쇠

이처럼 독일 정치는 시민교육에서 인재 양성, 그리고 정치 리더간 합의 민주주의의 구현의 중심에 정당이 굳건히 기능해왔다. 여시재가 개최하고 있는 각국의 정치지도자 양성 시스템 비교 세미나에서 독일 사례를 발제한 김주희 중앙대학교 국익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역사적 경험에서 기인한 민주시민 교육이 비판적이며 자기 주도적인 결정권을 지닌 인간으로 양성하는 기반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에 대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는 ‘의회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독일 사회’로 수렴되었고 독일이 유럽통합의 중심에 있게 하였다. 트럼프의 미국제일주의가 유럽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난민 문제로 촉발된 유럽의 분열 속에 독일의 정치적 리더십 역시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 극복 역시 시민을 대상으로 한 민주주의 소양 교육에 단초가 있음을 독일의 사례는 일깨워 준다.


<참고자료>
- 김성수(2010). 독일 정당 및 의회의 정책전문성 확보 메카니즘 - 입법부 중심 행정의 관점에서. 한독사회과학논총. 제20권 제3호.
- 김윤권 외 (2012). 한중일독 공무원 채용 및 승진제도 비교 연구. 한국행정연구원.
- 남궁근 외. (2005). 고위공무원단 도입에 따른 문제점 분석과 개선방안 연구: 주요국가 사례연구. 서울: 한국행정연구원.
- 임종헌(2013). 독일 정치재단의 정치교육. Journal of Political Criticism 12. pp.77-102.
- 정흥모(2015). 독일 연방의회의 동독 사회주의 과거청산: 앙케트 위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유럽연구 33권 2호. 411-432.
- 박길성(2014). 국가 엘리트 생성 메커니즘: 행정 관료 엘리트. 박태준 미래전략연구소 주최 2014 미래전략포럼 발표문
- 장덕진(2014) 정치 엘리트 생성 메커니즘의 국제비교 - 영국,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 박태준 미래전략연구소 주최 2014 미래전략포럼 발표문
- Liste der Enquete-Kommissionen des Deutschen Bundestags, 위키피디아

<관련 자료>
- 여시재 연구 세미나 (2차) 결과보고서: 각국의 정치지도자 양성 시스템 비교 - 독일, 싱가포르 사례 분석(첨부파일)

<관련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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