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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의 시대, ‘휴머노믹스’를 말하다

전병조 (여시재 특별연구원·전 KB증권 사장)

2020.12.18

‘사람답게 사는 세상’...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정책 최우선 목표로

자살률 세계 1위
경제성장 이면의 높은 불안 수준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 ‘이생망’. 어느 순간 냉소 가득한 신조어들이 우리 사회를 축약하는 술어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좌절과 불안을 나타내는 비극의 언어들이다.

한국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로 인정받는 비교적 ‘성공한 나라’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나라는 잘 되는데,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할까?’ ‘방송에서나 SNS에서나 행복한 삶들이 넘쳐나는데, 나는 왜 자꾸 뒤처지는 느낌일까?’와 같은 불안에 찬 호소들이 쏟아지고 있다.

불안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어 왔다. 각자도생이 사회의 기본이 된지 오래되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제위기, 사건․사고, 전염병 위기, 빠른 사회 변동 속에서 이를 해결하느라 개인 불안을 보살피기에 여력이 없었는지 모른다. 불안 문제에 대한 정부나 사회적 지원이 결핍된 가운데 고립되어 가는 개인들이 점차 늘어났다. 각자도생 사회의 어두운 면은 우리 ‘느낌’속에만 머물지 않고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자살률이 그것을 말해 준다. 자살률은 얼마 동안 다소 개선 추세를 보이다가 최근에 다시 증가하고 있다.[그림 1]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그림 2]) 무슨 차이일까. 교통사고의 경우는 사람들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행위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규제·통제(예: 음주운전 단속), 투자(예: 도로교통시설 개선)를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자살의 경우 정서적인 측면이 강해 미리 예측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수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단순한 행위 규제나 투자를 통해 방지하기 어렵다. 자살은 불안이 퇴행적으로 심화된 상태(극심한 좌절․분노․절망)에서 유발된다고 본다면, 불안을 유발하는 근원적 문제를 겨냥하지 않는 한 개선이 어렵다.

[그림 1] 한국 자살자 수 추이 (출처: 통계청)
[그림 2] 교통사고 사망자 수 및 부상자 수 추이 (출처: 경찰청)

일상화되고 광범위한 불안 문제
사회 시스템의 위험 요소들과 구조적 연결

우리 사회의 불안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안 문제를 체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불안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간 축적된 사회학 연구의 성과들은 불안 문제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는 사회적 불안이 단순히 개인적인 사유와 경험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요소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재열․정진성(2010)은 불안이 사회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위험 요소들과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림 3] 불안의 구조와 위험의 사회적 구성
(출처: 이재열, 정진성. (2010) 위험사회, 위험정치.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조권중.
(2014) ‘서울은 안전한가’ 불안사회 진단과 사회적 치유방안, 서울연구원, p.10에서 재인용)

불안이 다양한 사회적 위험요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실증연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불안을 양산하고 있는 요소들과 그 연계 관계를 종합적으로 조망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1)

[표 1]은 2007년, 2015년, 2018년 뉴스 기사에 등장한 불안과 관련되어 가장 빈도수가 높은 연관어를 분석한 결과다. 이재열․정진성(2010)의 불안 분석 모형이 제시한 것과 같이, 빅데이터 분석은 불안이 정치․경제․사회 요소들과 폭넓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안요소와 연계관계 빅데이터 연구
정치·정책 연관어 빈도 늘어나

2018년 분석 결과를 정리해 보면, 정치․사회․경제관련 연관어들이 가장 높은 빈도의 연관어로 등장하고 있다.[그림 4] 경제 관련 연관어들은 일반적인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와 관련하여 불안과 가장 관련이 높은 연관어들은 ‘금융, 부동산, 주가, 정책, 투자’ 등의 단어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대통령’과 ‘정부’가 매우 높은 빈도의 연관어로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정치․정책 연관어의 빈도가 최근으로 올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표 1] 뉴스에 나타난 불안 연관어 변화
(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9. ‘한국의 사회적 불안과 사회보장 관제’
- 사회적 불안에 대한 질적 연구. p.114. 편집 재인용.)
[그림 4] 불안 키워드의 2018년 뉴스 기사 주제분석
(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9. ‘한국의 사회적 불안과 사회보장 관제’
- 사회적 불안에 대한 질적 연구. p.110. 편집 재인용.)

불안은 거시적 시스템 요소와 밀접
부동산·주식 등에 민감하게 반응

빅데이터 분석은 우리 사회의 불안 요소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시사점을 제시한다. 첫째, 불안은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그 영향 요소들은 거시적인 시스템 요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개인의 불안에 정치․사회는 물론 경제, 금융시장, 그리고 관련 정책 요소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인들의 불안요인들이 실제로 경제사회 변동 또는 정책 변경으로 인해 새로 발생하거나 발생할 것 같은 인식을 갖는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특히 부동산(내 집 마련), 주식(자산관리), 금리(대출 기회) 등의 요인과 이와 관련된 정책 변경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은 이들 변수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정도가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불안 해소 역할 못하는
사회 시스템이 불안 더 키워

둘째, 정치․정책 연관어들의 빈도가 높고 시간이 갈수록 높은 빈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불안 문제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 기대가 높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기대가 높으니 관심이 많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이 자신의 불안 요인을 해소하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시스템이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는 데 역할을 못하니 더욱 불안하게 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불안과 관련된 여러 요소들은 서로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가. 연관어들의 네트워크 분석을 통하여 이를 파악할 수 있다. 네트워크 분석은 인과관계의 방향을 명확하게 밝혀주지는 않지만, 연계고리의 중심에 위치한 요소와 연계성의 강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림 5] 2018년 뉴스기사 연관어 네트워크 분석결과(불안)
(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9. ‘한국의 사회적 불안과 사회보장 관제’
- 사회적 불안에 대한 질적 연구. p.129. 편집 재인용.)

[그림 5]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연관어의 네트워크 분석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뉴스 불안 연관어 중심 단어
‘시장·대통령·정부·금융·금리’

뉴스에서 불안 연관어들의 중심을 차지하는 단어들은 시장/대통령/정부/금융/금리들이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부/주택/주가/금리/금융들이 모여 있고 이들은 일자리/최저임금 등의 용어와 근접하여 연계되어 있다. 개인 불안의 근원 중 하나인 일자리․소득 등의 요소가 거시적인 요소, 즉 경제현상과 경제정책적 요소에 크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일자리나 소득 불안이 거시정책적인 요소(정책의 도입, 변경, 또는 변동)에 크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키워드의 빈도 분석만큼이나 이들의 네트워크 분석 결과는 불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어떤 측면은 상식적 이해와 다르다. 가장 큰 영향력이 있는 중심어가 대통령이라니! 아무리 대통령 중심 국가라지만, 대통령이 불안의 중심어가 되리라고는 분석결과를 보기 전엔 짐작하기 어려울 듯하다.

우리 국민들은 거시경제와 관련되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도 엿볼 수 있다. 금융/금리/주가/부동산 등 거시경제적 이슈들이 기사에 노출될 때마다 우리 국민들의 관심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뉴스 기사를 대상으로 한 분석이라는 제약점도 동시에 감안해야 함은 물론이다.

불안의 그림자는
형편이 나은 사람에게도 드리워

흔히 불안은 빈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먹고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앞으로도 막막하다면 불안감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만 불안한 것이 아니다. 경제적 상황이 비교적 안정적인 사람도 불안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사회불안은 삶의 만족이나 행복감, 긍정적 정서와 상관없다.’ ‘우리 사회의 불안은 비교적 경제적 사정이나 행복수준이 높다고 해도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규직 그룹’도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인터뷰 조사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2)

“정규직이지만 이 직장에서 안 잘린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중략] 이직 대비해서 자격증 공부를 하는데, 회사 사람들이 옛날 문화가 있어서 직장에서 거의 12시간 있어요. 제가 집이 멀어서 준비를 못 해요. 게다가 정규직도 사유를 갖다 붙이면 해임이 가능하다, 조심해라 엄포를 놓으니까 잘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해요.”

“제가 일하는 미래 기술 분야에서 한국은 불안한 상태여서 앞으로 현상황이 유지될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앞으로는 평생직장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가족과 잘 지낼 수 있는지 금전적 고민이 많아요. 제가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데 집값이 워낙 많이 오르고 어떻게 될지 몰라 서 긴장 상태예요. ... [중략] ... 제가 개선할 힘이 없고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까워요.”

“서울 올라와서 정규직 틀에 들어오면서, 나도 남들처럼 살아 보자 생각했어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한 직장에 오래 다니고 경력 쌓고 살아 보자 하니까 남하고 비교하게 돼요. 이때에는 이런 걸 성취해야 한다는 사회적 틀 안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하고 비교가 되고 거기서 불안이 시작돼요”

외환위기 이후 각자도생의 사회로
사회적 지지와 지원 제한적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불안에 대한 대처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사회적 지지/지원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지적한다. 즉 불안은 개인의 문제이고 자기 책임 하에 해결하도록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불안에 대응하는 시스템적 방안의 결여는 역으로 불안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러한 각자도생이 사회를 이루는 기본이 되게 한 근원적인 계기는 1997년 외환 위기라고 지적한다.

포스트코로나 대변혁기
불안 사회 심화 시킬 위험 커져

앞으로 우리 사회의 불안을 더욱 심화시킬 다양한 요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림 6]은 불안 사회 극복을 위해 대응해야 할 요인들을 예시하고 있다. 전염병 대유행과 동시에 새로이 등장한 도전 요인과 더불어 구조적 요인, 정책대응 요인들을 불안 문제 극복을 위한 과제들로 제시하고 있다.

[그림 6] 불안시대 해결을 위해 대응해야할 요인들

전염병 대유행을 전후하여 개인과 국가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합적인 위협요인들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 ‘대전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3대 변화 요인들은 우리 경제에 위험뿐 아니라 커다란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3) 성공적인 방역 성과, 그로 인한 경제적 하방 위험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다면, 코로나 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위상과 국가 브랜드 가치는 크게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 전환 역시 우리 경제가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 위기와 디지털 경제의 순기능적 시너지는 향후 비대면/디지털 경제의 활성화를 예고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우리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잘 준비하고 기회를 살려간다면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 기반이 되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은 불안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일상을 크게 흔들고 불확실성을 높여 불안을 가중할 가능성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로 인한 경제 위축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 개인을 가두어 놓는다. 전염병 확산 이후 취약계층의 일자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크게 타격을 받고 있다. 특히 청년 계층의 일자리 감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그림 7]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직접적인 영향권 내에 있다.[그림 8]

[그림 7] 전염병 확산 이후 월별 청년 취업자 변동
(출처: 김유빈. 2020.12.8. ‘코로나 19 전후 청년고용 현황과 청년일자리 정책방향’. 한국노동연구원.)
[그림 8] 자영업자․ 봉급생활자 현재 생활형편 CSI 격차
(출처: 연합뉴스 2020.7.27.)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광범위한 변화
‘파괴적 혼란’으로 개인 불안 심화

더욱이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개인과 사회의 변화 속도 차이를 더욱 확대하고 유리(遊離)시키게 될 것이 분명하다. 기존 연구결과들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개개인의 삶이 겪게 될 ‘파괴적 혼란’(disruption)의 수준은 더욱 커질 것이고, 따라서 불안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빠르고 광범위한 경제사회의 변화는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 계층의 불안을 더욱 심화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기존 산업의 대변화와 일자리 지형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기술적 역량과 기회를 이미 가지고 있는 부분 집단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성장·고령화·분배구조 악화 등
내재된 구조적 문제 맞물려

새로운 도전 요소 외에도 이미 내생적으로 자라온 구조적 문제들도 있다. 저성장의 고착화(잠재성장률의 하락), 저출산․고령화, 분배구조의 악화 등이 그것이다. 이들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이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이들 요소들은 이미 불안의 사회의 근원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앞서 살펴본 연구결과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등장한 새로운 도전들은 이러한 내재적인 문제와 여러 경로로 상호작용하면서 불안 문제를 더욱 확대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더욱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조적 문제와 새로운 도전과제에 대응하는 우리의 해결 역량과 관련된 문제들도 있다. 바로 ‘정치’와 ‘정책’의 난맥상이다.

정책은 ‘가치’를 지향
시대가 요구하는 정책 만들어내야

정책은 가치(價値)를 담는다. 단순한 학술이나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지향에 따라 ‘특정한 가치’를 지향한다. 따라서 정책은 순수한 논리적 정합성 외에 가치를 담게 되는 것이다. 정책의 관점에서 이론은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적 역할을 맡는다. 정치는 이러한 정책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가치(국민이 원하는 것)를 반영하는 최적의 대안을 찾는 과정이다. 정치의 생산성은 바로 가치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기대에 우리 정치가 부응하는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지 않을까. 정책이 타협의 과정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정책을 적기에 만들어 내는 역할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평가가 온당할 것이다. 정책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정쟁(政爭)의 씨앗이 되어 정책과정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앞서 불안의 요소 중 정치 관련 연관어의 빈도가 높고 중심적인 관련어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국민들의 평가가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나의 문제를 외면하는 정치에 좋은 평가를 보내기는 어렵다.

불안 문제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대두

불안이 다양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 특히 정치․경제․정책 등의 요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연구결과를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예상되는 변화가 불안 문제를 더욱 증폭 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나아가 새로운 도전과제들이 구조적인 문제, 정치과정상의 문제들과 복합적으로 시너지를 내면서 불안을 더욱 증폭시킬까 두렵다.

불안 문제가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새로운 시대의 과제로서 대응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개인의 생존과 발전에 대한 불안’문제의 해결이 이른바 ‘시대정신’의 하나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불안 문제를 개인의 책임에 방치하지 않고 어떤 형태든 국가 차원의 종합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국가의 비전도 이에 적극 부응하는 방향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
개인의 성장과 발전 추구하도록 지원

새로운 국가의 비전은 개인의 불안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 또는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나라’로 설정하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소극적으로 개인의 불안 요소를 해소하는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변화하는 경제사회의 구조적 위험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발전과 성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도록 지원하는 국가와 사회를 의미한다. 개인의 발전과 성장에 대한 사회적 개입과 지원은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변화의 폭과 속도, 위험의 질적․양적 속성이 개인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위기, 경제 침체, 디지털 전환... 그로 인한 개인의 위험과 불안을 어떻게 개인 차원에서 해결한단 말인가. 새로운 비전은 ‘각자도생’ 패러다임을 국가와 사회의 공통 과제로 옮겨 감을 의미한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나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삶의 질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나라를 만든다는 의미이다. 디지털 기술 환경 하에서 비대면/온라인 경제의 확산은 국경(國境) 개념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제 개인은 ‘이민’이나 ‘해외 투자’를 통해서만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에 거주하면서도 얼마든지 실질적인 활동은 디지털 세계를 통하여 다른 나라에서도 가능하게 되어 가고 있다. 기존의 오프라인 방법과 온라인 방법을 적절하게 혼합할 경우 개인의 국가(國家) 선택(選擇)은 적은 비용과 빠른 속도로 가능하게 될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국가 선택이 이처럼 용이해지면 사회적 불안은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가 선택의 역량이 개인마다 다르다는 점을 감안할 때(소득수준과 디지털 역량이 높은 개인은 국가 선택 역량도 높다.), 불안 수준이 높은 ‘불안 국가’는 역량 있는 국민을 장기적으로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일종의 ‘역선택(逆選擇) 현상’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불안의 척도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국가는 물리적 영토 내에 있는 국민은 물론 세계 국민들을 잠재적인 국민으로 끌어들이는 국가가 될 것이다. 결국 불안 대응 역량은 국가의 장기적인 경쟁력, 흔히 말하는 ‘시스템 경쟁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셈이다.

어느 나라 국민이 보더라도 한국이 자신의 성장과 발전, 나아가 자식들의 인생을 펼쳐 가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나라의 경쟁력은 높아질 것이다. 인재와 돈이 몰리는 나라가 양적․질적 성장을 이루어 가는데 유리한 것은 자명하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나라’는 이러한 국가 경쟁력 관점에서 설정한 국가 비전이다.

불안 문제는 사회정책 차원을 넘어
종합적인 정책대응을 요구한다

불안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위험과 다방면에서 중첩되어 있다. 특히 거시적인 이슈인 정치․경제․정책 이슈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불안 문제가 협소한 ‘사회정책’ 차원에서 좁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님을 의미한다.

더욱이 지금까지 누적되어온 사회 구조적 위험에 대응하는 방식이나 성과가 미흡하다는 점은 앞으로 대응 방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새로운 국가 비전을 단순한 불안 해소를 차원 넘어, 적극적으로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정책은 물론 종합적인 정치․경제 정책의 대응이 요구된다. 불안 문제에 대한 국가정책의 대응을 새로운 관점에서, 종합적인 관점에서 재설계(再設計)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새로운 경제철학은
사회정책과의 융합을 요구한다

새로운 국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정책은 단순한 복지 정책적 관점을 강조하는 보완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정책과의 적극적 융합(融合)’을 필요로 한다. 사회 정책과의 융합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철학은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경제정책의 최우선적 목표로 설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경제철학은 ‘인본주의 경제철학’(‘휴머노믹스’)이다.

새로운 경제철학이 사회정책과의 적극적 융합을 지향한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인 삶의 구성요소(삶의 7대 구성요소는 일자리/소득/주거/건강/안전/공동체/가치를 말한다.)를 중심으로 경제․사회․정치 이슈들이 이들 요소에 미치는 영향을 정밀하게 포착하여 정책 설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 설계의 관점은 앞서 살펴 본 불안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다. 빅데이터 분석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정치․경제․사회․정책 등 거시적 이슈들은 개인의 삶과 연계된 모든 요소들, 즉 일자리, 소득, 주거, 건강, 안전 등의 이슈와 강하게 연계되어 있다. 새로운 경제철학, 즉 휴머노믹스는 정책 설계 단계에서부터 직접적으로 개인의 삶과 관련된 관점에서 영향을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한다는 지향성을 명확히 한다. [그림 9]는 휴머노믹스 정책 설계의 체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림 9] 휴머노믹스 정책 설계의 체계
[그림 10] 휴머노믹스 정책 설계의 관점

[그림 10]은 휴머노믹스의 경제정책 설계의 관점을 예시하고 있다. 휴머노믹스의 경제정책은 삶의 변화 요인들 (외생적․내생적)이 삶의 구성요소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변화 요인들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세대별․직업별․지역별로 미시적으로 분석․정리될 것이다. [그림 10]은 휴머노믹스가 일자리 정책을 바라보는 관점을 예시하고 있다.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되, 정책 대응은 크게 일자리를 만드는 측면(‘혁신’)과 일자리를 보호하는 측면(‘포용’)을 모두 고려한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적어도 모든 정책들이 이러한 점을 조금씩은 염두에 두고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휴머노믹스는 이런 관점들을 명시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정책 선택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이 기존의 정책과정과 사뭇 다른 점이다.

경제정책은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경우에도 다양한 정책 수단의 선택과 조합이 가능하다. 정책은 또한 자원의 투입을 요구하는데, 관점에 따라 어느 정도의 자원 투입을 할 것인가도 달라진다. 휴머노믹스가 명시적으로 개인의 삶이라는 관점을 정책 설계와 선택의 기준으로 제시한다면 매우 색다른 정책수단과 재원 투입 수준이 결정될 것이다. 이러 의미에서 경제철학이 단순한 ‘정치적 표어’(political motto)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경제정책의 내용과 수준을 결정하게 된다.

휴머노믹스는
새로운 시대의 열망을 담아내는 그릇

어느 시대 국가든 그 시대의 국민적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면 장기 발전을 보장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어 낸 몇 안 되는 ‘성공한 국가’이다. 그러나 총합적인 성과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개인 차원의 발전, 성장,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국가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시절, 수많은 ‘내일에 대한 약속’을 믿고 묵묵히 일해 온 국민들은 은퇴와 함께 노후생활을 오롯이 혼자 책임져야 한다. 경제 규모가 두 배로 커지는 가운데서도 상황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급작스러운 국가적 위기 속에 사회에 나온 세대들은 좁아진 일자리 기회에 전전긍긍해 왔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매일 공시 학원과 스펙 학원에 드나들며 자기고립(自己孤立)을 심화시키고 있다.

불안이 세대와 계층을 불문하고 확산되고 깊어가는 사회는 건전한 장기 발전과 성장을 이어 갈 수 없다. 내일이 오늘보다 더 막막한 사람들이 많은데 ‘공허한 내일’에 대한 약속을 헛되이 되풀이하는 시스템은 어쩌면 더 큰 비극적 위기를 예정해 놓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개인의 불안, 개개인의 삶의 질에 대해 국가와 사회가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다. ‘사람 사는 세상’은 그 시작을 알렸다. 이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게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휴머노믹스’는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정치와 경제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경제철학이며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참고>
1)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9. ‘한국의 사회적 불안과 사회보장 관제’ - 사회적 불안에 대한 질적 연구.
2)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9. ‘한국의 사회적 불안과 사회보장 관제’ - 사회적 불안에 대한 질적 연구.p. 163-7.
3) 전병조. 2020.8. ‘포스트 COVID-19 세계 경제 순위, 크게 뒤바뀐다’. 여시재 인사이트.




필자 전병조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美 아이오와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 관료와 ADB(아시아개발은행) 이코노미스트를 거친 뒤 증권사(KB증권) 사장을 지냈다. 현재 여시재 특별연구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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