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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 담합’이 만드는 일본 총리, 21세기에도 유효할 것인가

황세희 (여시재 미래디자인실장)

2020.09.11

스가 요시히데 현 일본 관방장관 (출처: 뉴시스)

스가 관방장관
99대 총리 확실시 이어 100대 총리 가능성 커

10월 14일 열릴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스가 요시히데 현 관방장관의 당선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스가가 당선되면 의회 선출 절차를 거쳐 일본의 99대 총리가 된다. 스가는 100대 총리가 될 가능성도 높다. 현재 일본 내에서 나오는 얘기를 종합하면 자민당이 이르면 10월에 중의원을 해산한 뒤 조기 총선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스가 내각 출범 직후 여론이 호의적일 때 선거를 치르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민당이 현재 수준 이상을 달성하게 되면 스가는 다시 한번 총리가 될 수 있다.

스가는 8월 28일 아베 신조 현 총리가 사임 기자회견을 했을 당시만 해도 총리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관측됐다. 설령 아베 후광을 업고 총리가 되더라도 장기 집권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자민당 내부 분위기가 불과 보름 만에 스가 쪽으로 확실히 기운 데다 여론마저 스가를 지지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앞날을 모르긴 해도 스가가 약체 총리가 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8월 28일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표명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출처: 연합뉴스)

아베 총리
‘다음은 스가상에게’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것은 어떻게 해서 자민당 안팎의 힘이 일거에 스가 쪽으로 쏠리게 되었는가다. 이는 일본 정치구조와 직결되는 문제다.

‘차기 총리 스가’가 일본 내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아베 총리의 사임 기자회견 이틀 후부터였다. 아베 총리가 ‘다음은 스가상에게’라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고 각 파벌들이 스가 지지를 앞다투어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9월 2일 진행된 스가 장관의 출마 기자회견은 총재 선거에 임하는 포부를 듣는다기보다는 차기 정권이 아베 정권의 기조를 유지할 것임을 확인하는 자리에 그쳤다. 선거 시작도 전에 승리가 정해져 있는 일본의 리더십 교체는 대통령제의 한국에서 보기엔 기묘할 정도다.

아베 주도 정치를 가능하게 한
‘스가 내각 관방’

스가 관방장관이 차기 총리로 급부상한 배경에는 아베 정권의 정치역학이 존재한다. 당초 아베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인물은 아베 내각에서 외무성과 방위성 장관을 지낸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무조사회 회장, 아베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인 가토 가쓰노부 후생노동성 장관, 개성 강한 고노 다로 방위성 장관 등이었다. 이시바 시게루 의원은 ‘포스트 아베’ 여론조사에서 항상 압도적 1위였지만 당내 파벌이 약했다. 스가도 무파벌이라 할 정도로 파벌에 깊이 관여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베가 스가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관방장관이라는 직책을 충분히 활용한 아베 정권의 특성이 가져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관방장관이
‘아베 어젠다’ 모두 총괄

관방장관의 정식 직책은 내각관방장관이다. 내각관방 홈페이지에 의하면 내각관방의 주요 직무는 내각 수장인 내각총리대신을 직접 보좌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내각의 서무, 내각 중요 정책의 기획 입안 및 종합 조정, 정보 수집 조사 등을 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내각관방의 영문명이 ‘Cabinet Secretariat’인 만큼 총리 비서실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광범위한 정책 총괄과 조정기능을 발휘한다. 국가안전보장국, 내각정보통신감, 내각위기관리감, 내각인사국과 같이 내각관방 고유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 외에 내각관방이 관할하는 직속기관은 40여 개에 달한다. 이러한 기관에는 ‘정보통신기술(IT) 종합전략실’ ‘일본경제재생종합사무국’ ‘교육재생실행회의 담당실’ ‘행정개혁추진본부 사무국’, ‘건강 · 의료 전략실’처럼 총리가 총괄하는 국가전략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부서들이 모두 포함된다. 또 TPP(환태평양 파트너십협정) 등을 비롯한 정부 대책본부, ‘마을 · 사람 · 일자리 창생본부 사무국’, ‘납치문제 대책본부 사무국’, ‘도쿄 올림픽 경기대회 · 도쿄 패럴림픽 경기대회 추진본부 사무국’, ‘1억 총활약 추진실’처럼 ‘아베 어젠다’도 총망라한다. COVID-19 대응을 위한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대책추진실’과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대책본부 사무국’도 관방에 급히 설치됐다.

일본 내각관방조직도 (2020년 7월 30일 기준, 출처: 내각관방홈페이지(https://www.cas.go.jp/jp/gaiyou/pdf/200730_sosikizu.pdf))

이처럼 각 부처가 담당하는 행정업무 가운데 내각 차원에서 부처별 협의와 방침을 협의 조정해야 하는 모든 일을 내각관방에서 맡는다. 물론 복수의 부처가 참여해서 결정해야 하는 국가 주요 시책은 우리의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각의(閣議)에서 이뤄진다. ‘각의 결정’은 그저 일상적인 국무 처리뿐만 아니라 개헌에 버금갈 정도의 일까지도 해치운다. 2014년 7월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인정도 각의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각의 결정조차도 총리의 지시를 받은 내각관방의 사전 작업을 통해 진행됐다 봐야 한다.

cf. ‘관방(官房)’이라는 말의 유래
19세기 말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 전, 군주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면서 각종 기밀을 취급하던 직책 ‘Kammer’에서 유래했다. 독일 제도를 받아들였던 일본 메이지 정부 때 이 말을 음독(音讀) 해서 설치한 것이 ‘관방’이 되었다. 국가 기밀을 물론, 회계 서기 등 국가의 핵심을 모두 다룬다. 하지만 총리의 성향에 따라 힘이 붙거나 빠지거나 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도쿄 시내 거리를 가득 메운 피난
시민들 (출처: 한국일보)

관료들의 나라 일본
2007년 연금 기록 분실로 흔들려

2007년 국민연금 납부기록 분실은 일본 관료제에 대한 불신을 싹트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어진 민주당 정권 시기인 2011년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수습 과정에서 일본 국민들은 일본 관료 제도의 문제점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일본 국민들은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국가적 위기감 속에서 개혁 보다는 또 한 번의 안정, 자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택했다. 그것이 아베 내각이다. 아베노믹스를 비롯한 2기 아베 정권의 국가전략이 일본 사회의 부흥을 이끌 것을 기대했다. 금융완화, 과감한 재정지출, 신산업 육성을 경제재건의 3개의 화살로 삼아 ‘잃어버린 20년’을 되찾겠다는 아베 정권의 비전에 국민들은 희망을 걸었다. 아베 정권에 대한 절실한 기대는 2013년 1월 아사히TV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정권을 지지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62.4%로 정권 교체 직전인 2012년 12월 여론조사에 비해 43%나 높아졌다.

내각관방에 인사국 설치
관료사회 완전 장악

이런 상황에서 집권한 아베 정권은 내각관방 위상을 대폭 강화했다. 이는 ‘총리 관저 주도 정치’라는 아베 정권 특유의 정권 장악력의 기반이 되었다. 그 핵심 장치가 바로 내각관방 내에 설치된 내각인사국이다. 아베 내각 2년 차(2012년 12월 출범)인 2014년 5월에 설치된 내각인사국은 국가 공무원의 인사관리에 관한 전략적 중추 기능을 담당한다. 내각인사국의 주요업무는 국가공무원의 인사행정, 국가 행정조직 인사, 간부 인사의 일원화된 관리 등이다. 관료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일본 관료제는 자민당 장기 독재를 가능하게 한 조직적 배경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각인사국이 공무원 인사관리를 주도하게 되니 내각의 국정 장악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각관방의 국정 장악을 위한 1차 제도 정비는 민주당 정권기에 마련되었다. 2009년 집권한 민주당은 관료의 힘을 빼고 정치인들의 장악력을 높이는 조치를 잇따라 도입했다. 관료사회의 거센 저항 속에 시도에 그쳤다는 평가도 없지 않으나, 민주당의 문제의식이 아베 정권의 효율적인 국정 장악을 위한 기반을 제공해 줬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아베 정권은 내각 관방에 인사권을 통합합으로써 관료사회를 손아귀에 넣었다.

스가는 역대 최장수 관방장관

스가는 2차 아베 내각이 발족한 2012년 12월부터 내각관방장관직을 이어왔다. 역대 최장 관방장관 재임이라는 기록은 2016년 7월에 이미 갱신하였다. 아베 총리의 최장 총리 기록에 버금가는, 어쩌면 더 갱신하기 어려울 관방장관 재임 기록을 스가 장관은 지니고 있다. 스가 장관은 지난 7여 년의 기간 동안 아베 정권의 핵심에서 모든 국가전략을 조정, 총괄해왔다. 아베 입장에서는 자신의 급작스런 사임이 가져올 충격과 혼란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총리직 수행을 지지해온 자민당 각 파벌에게 안정적인 국정 참여 지분을 보장하기에 스가 관방장관이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 같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대신, 아마리 아키라 자민당 세제조사회장,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
(출처: 연합뉴스, 로이터, 뉴시스)

아베 내각의 파벌 기반
스가가 접착제였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자민당 내 다수 파벌들이 동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2차 아베 정권을 구성한 자민당 내 그룹으로는 아베가 속한 최대 파벌 호소다파 외에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이 이끄는 시스이회(志帥会)와 아소 다로 재무대신의 시코우회(志公会)가 있다. 아베 내각 출범 당시 이 파벌들의 연결고리가 스가 관방장관이었다.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아베가 출마할 때만 해도 그가 다시 총재에 취임할 것이라는 예측은 소수에 그쳤다. 그러나 스가 당시 중의원 의원이 아소 다로 중의원 의원과 아마리 아키라 중의원 의원을 설득해 아베 지지 파벌을 결집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2차 아베 정권이 들어서고 아소는 부총리 겸 재무대신으로, 아마리는 경제재생담당대신에 임명되었고 이후 TPP 담당 대신을 겸임하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아베 정권의 주요 경제정책을 담당하며 아베노믹스 추진을 도왔다. 집권 초기 아베노믹스의 과감한 양적 완화, TPP 추진 등을 두 대신이 지휘하며 의문시 되던 아베노믹스가 궤도에 오르는데 공헌했다.

특히 여기에 2013년 자민당 간사장으로 니카이 도시히로 중의원 의원이 취임하며 당내 파벌 간의 연대는 안정화되었다. 자민당 간사장은 당 총재가 총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실질적인 당의 리더 역할을 담당한다. 국회 내 영향력을 흔들림 없이 장악한 니카이 간사장은 당내 실세로 군림하는 대신 아베 총리가 경제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리더십을 제공해 주었다. 다만 니카이는 아베 정권의 정치적 동지라기보다는 전략적 파트너라는 느낌이 강하다. 오랜 간사장 취임 과정에서 정권 말기 간사장 교체설이 돌자 아베의 라이벌인 이시바 시게루 의원과 만나는 등 총리 교체 후에도 간사장 연임을 위한 포석을 깔았다. 아소 대신과 니카이 간사장은 스가 관방장관 지지를 조기에 표명하며 스가의 총리 지명을 확실하게 하였다.

일본 국민들은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데
일말의 의심도 없어

중의원과 참의원으로 이루어진 일본 국회에서 중의원 의원은 고유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바로 대의사(代議士)라는 호칭이다. 민주적 절차를 걸쳐 국민의 민의를 대변하기 위해 선출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필자는 유학 기간 중 3년 반 정도 민주당 중의원 의원의 국회 사무소에서 일했다. 국회 근무 초기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이 바로 대의사(代議士)라는 호칭이었다. 메이지 헌법 제정 당시 귀족원에서 출발한 참의원 의원은 ‘참(參)’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 국민에 의해 선출된 중의원의 의사결정에 참가한다는 의미가 여전히 강하다. 때문에 참의원 의원의 호칭은 ‘OO 선생’인데 비해 중의원 의원들은 서로를 ‘OO 대의사’라고 불렀다. 참의원 의원들과 구별하기 위한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게 깔려 있다. 일본 정치에서 중의원이 가지는 상징성은 지대하다.

총선거를 통해 국민은 정당을 선택하고 전적으로 선택을 위임한다. 대의민주주의를 수행한 각 지역구 의원들에 대한 판단은 다음 선거를 통해 표출된다. 민주화 운동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성취한 한국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생소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은 자신의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6년 임기가 보장되는 참의원 의원들에 비해 중의원 의원들의 임기는 불안정하다. 상황에 따라 언제라도 의회 해산이 되는 상황에서 상시적인 긴장감이 있다. 중의원 의원들은 총선거 다음날부터 총선거를 준비해도 다시 선출되기 위해 ‘대의사’로서의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 선출되고 또 앞으로의 선출을 책임져야 할 중의원 의원의 선택은 존중받는다. 이런 까닭에 전후 일본 총리 중 참의원 출신 총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민당 당칙 9조는 총재 선거 후보의 자격을 ‘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참의원 의원의 총재 선거 출마를 제한하는 규정은 없다. 대신 당칙 10조가 다만 20명 이상의 추천인을 모아야 입후보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20명의 추천인을 모을 수 있는 파벌을 형성하는 핵심은 자연스레 중의원 의원이 된다. 아베 총리와 같은 야마구치 지역구를 가진 하야시 요시마사 참의원 의원(방위대신, 농림수산대신, 문부과학대신 역임)이 유일하게 참의원 중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정도이다. 실제로 하야시 의원은 2012년 총재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이러한 예외적인 인물을 제외하곤 의원들 간에도 총재는 중의원 의원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공감대가 있다. 이러한 간접적인 선출 방식은 대의사라는 중의원들의 책임과 권한을 그만큼 존중하는 것이다.

오는 26일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8일 열린 소견 발표 연설회 (출처: 로이터)

파벌들 간 합종연횡이 국가 진로 결정
언제까지 갈 것인가

따라서 자민당 내의 파벌 간 합의에 의해 총재 선출이 대략 결정되는 것은 일본 정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총리로서의 국정 수행이 성공적인 경우 총재 임기인 3년을 채우고도 재임하는 경우는 종종 있어왔다. 2015년 자민당 총재 선거는 3년 임기를 채운 아베 총리가 단독 후보로 출마해 무투표로 임기가 연장되었다. 2000년대 전후만 해도 모리 요시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등이 동일하게 무투표로 재임되었다.

다만 이번 총재 선거는 변칙적인 방식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있다. 자민당 당칙에 따르면 총재 선거는 의원 투표 50%, 당원 투표 50%로 진행된다. 당원 투표는 도도부현(都道府県) 별로 집계하여 각 후보자의 득표수를 바탕으로 당 소속 국회의원 수와 동일한 수의 표를 배분한다. 이러한 투표 과정을 통해 진행된 지난 2018년 선거에서 아베 총리는 의원 표 329표, 당원 표 224표를 획득했다. 아베의 라이벌 이시바 시게루 중의원 의원은 의 원표가 73표에 그친 반면 당원 득표가 181표였다. 총104만에 달하는 자민당원 가운데 투표 총인원 64만 명이 참가한 2018년 총재 선거에서는 아베 총리 35만5천표, 이시바 의원은 28만6천표를 획득했다. 당원 지지에서는 이시바가 상당히 선전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번에 당원 투표가 진행됐다면 이시바 의원이 스가 의원을 앞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자민당 집행부는 당원 투표가 우편 투표 등으로 진행되는 만큼 통상 2개월 이상이 소요된다는 이유를 들어 당원 투표를 아예 생략했다. 이시바 의원을 견제하기 위해 의원 표만으로 진행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를 겨냥한 듯 이시바 의원의 이번 총재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납득과 공감’이다.

21세기에도 투표 절차의 어려움을 이유로 당원 투표를 생략하는 자민당 집행부의 결정에 일본 국민은 납득했을까. 자민당 현직 의원들의 담합으로 선출된 총재 선거의 결과에 일본 국민들은 얼마나 공감할 것인가. 국민들의 평가는 다음 중의원 선거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2006년 9월에서 2007년 9월에 걸친 1차 아베 정권은 전후 일본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자민당 정치가 궁지에 몰렸던 시기였다. 연금 납부기록 분실은 일본이 자랑해온 관료제의 문제점을 만천하에 노출했다. 자민당과 관료를 신임해 오던 국민들의 거센 분노를 불러왔다. 2007년 7월 28일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참의원 의석 과반을 야당인 민주당에 빼앗긴 뒤 국정운영이 더 어려워졌고 결국 2년 뒤 중의원 선거에서까지 역사적인 대 참패를 당해 정권을 잃었다.

2007년 가을 국회 개회에서 소신 표명 연설을 하는 아베 총리
(출처: 오마이뉴스)

자민당의 재도약일 것인가
흑역사로의 회귀일 것인가

2007년 9월 10일 가을 국회 개회에서 아베 총리의 소신 표명 연설을 방청한 기억이 선명하다. 국회 연설 시 상대당 의원들은 야유를, 같은 당 의원들은 지지의 고함이 오가는 것은 일본 국회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날의 국회는 완전히 수세에 몰린 아베 정권과 정권 교체를 목전에 둔 듯한 민주당의 기세등등함이 극에 달했다. 아베 총리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으나 그가 느꼈을 정신적 부담감은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이 사람은 오래 버티기 힘들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아베 총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임을 표명했다. 제1차 아베 정권의 급작스런 종료는 자민당 정치의 혼란을 극대화했다. 지병을 이유로 정권을 내던졌다(政権丸投げ)는 비난도 쇄도했다. 아베 이후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가 각각 1년의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자민당의 정권 장악력을 회복하는 것은 요원했고 어느 시점에서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치러야 자민당의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가가 주된 고민이었다. 그리고 이어졌던 민주당 정권기에서도 정치 혼맥상은 이어져 세 명의 총리가 1년여마다 교체되었다. 전후 자민당 정치의 흑역사이자 일본 정치의 암흑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베 총리의 사임에 자민당이 최대한의 리스크를 줄이고 국정 운영에 최대한 변화를 회피하려 하는 모습은 10여 년 전의 흑역사에 대한 경계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스가 앞에는 앞으로 COVID-19 대응과 도쿄 올림픽 개최, 디지털 전환, 경제 회복 등 여러 과제가 산적해 있다. 아울러 ‘55년 체제’라고 불려온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의 지도자 선정 방식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일본의 대의민주주의는 21세기에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지에 대한 문제 제기 역시 피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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