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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의 對中 인식 ①] “미중 패권 교체, 당분간 없다”

다카하라 아키오 (高原明生, 도쿄대 교수), 감수·일본 안전보장외교정책연구회

2020.01.09

中, 정치체제·고령화·부족한자원·無동맹·非기축통화 난제 수두룩
美, 많은 나라가 ‘오만한 미국’ 싫어하는 게 가장 큰 문제

다카하라 아키오(高原明生) 도쿄대 교수

일본 최고의 중국 전문가로 꼽힌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영국 석세스 대학에서 중국 정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콩 주재 일본 총영사관 전문조사원으로 일했고 릿쿄대 교수를 거쳐 2005년에 도쿄대에 부임했다. 2009년부터 5년간 진행됐던 ‘중일우호 21세기 위원회’ 일본 측 대표단에 참여했다. 아시아 각국이 배타적 민족주의를 억제하고 ‘자립과 평등과 공생’ 이념을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도쿄대 공공정책대학원장이다.

현대 일본의 최대 관심사가 ‘중국’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변화’ ‘미중관계의 미래’에 대한 수많은 세미나와 심포지엄, 비공개 학습모임이 열린다. 그 밀도는 한국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정계, 재계, 학계는 그런 모임들을 통해 진로를 잡는다. 일본의 지식 엘리트들이 중국을 어떻게 보는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참고사항이 될 것이다.

(재)여시재는 연구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 ‘안전보장외교정책연구회’가 최근 공개한 연구 결과물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순차적으로 전문 번역 소개키로 했다. 이는 정책연구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안전보장연구(Security Studies)’에 실렸다. 모두 네 편으로 첫 번째는 도쿄대 다카하라 아키오 교수가 쓴 ‘미중대립-패권의 향배’다. 번역은 가급적 원문에 충실했으며, 다만 제목은 안전보장외교정책연구회 측 동의를 얻어 여시재가 편집했다.

‘안전보장외교정책연구회(SSDP)’는 2016년 10월 출범한 외교 안보 분야 민간 싱크탱크다. 일본의 안전보장 정책, 외교정책에 대한 연구모임과 정책 제언을 하고 있으며, 여시재와 2018년 여시재포럼, 2019년 한일 공동세미나인 FUTURE CONSENSUS DIALOGUE 등을 공동주최하고 있다. SSDP 아키야마 마사히로(秋山昌廣) 대표는 방위 사무차관 출신으로, 여시재 특별연구원도 겸임하고 있다.

게재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미중대립-패권의 향배 - 다카하라 아키오 도쿄대 교수
2. 중국경제의 과제 - 다나카 오사무 일본무역진흥기구 아시아경제연구소 상석주임연구원
3. 미국의 對中 전략관-동맹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 와타나베 쓰네오 사사가와 평화재단 상석연구원
4. 시진핑 정권의 국제질서관? 정치는 국제연합 중시, 경제는 자유주의 옹호 - 가와시마 신 도쿄대 교수

번역·황세희 (여시재 미래디자인실장·게이오대 법학박사)

1. ‘중국몽’
<미중대립-패권의 향배>

1784년 후반 미-중 교역 시작
조선인삼이 교역물 중 하나

세계에서 베이징(Peking)과 상하이(Shanghai)와 광둥(Canton)이 있는 나라가 어디냐고 한다면 물론 중국이지만 실은 미국이기도 하다. 미국의 서부가 아니라 동부나 중부에 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아무래도 그 지역의 상인이 중국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본 것과 관계되는 듯하다. 처음에 화물을 싣고 중국에 상품을 수출한 것은 1784년이며 그 배는 ‘Empress of China’ 호였다고 한다. 그 당시 미-중간 주요 교역물 중 하나가 조선 인삼이었다. 미·중 관계는 이처럼 역사적 에피소드로 가득 차 있고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미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감정에는, 일반적으로는 중국의 유구한 문명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 보인다. 반대로 중국에서 미국을 보는 눈에는 이 또한 예사롭지 않은 존경과 그리고 미국을 향한 동경심이 있다. 최근 들어 미국에 관한 중국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동경은 콤플렉스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심리들 아래서 미중 대립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Chinese Dream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들어선 중국夢

흥미로운 것은 ‘중국몽’이라는 개념이다. 2012년 정권의 정상에 오른 시진핑은 그 2주 후에 ‘중국몽’이라는 개념을 제창했다. 지금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중국의 꿈”으로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실은 ‘중국몽’이란 한자 세 글자는 2년 전인 2010년 1월에 출판된 책의 제목이었다. 국방대학 교수 류밍푸(劉明福) 대령이 쓴 책이었다. 그 내용은 중국이 앞으로 군비 확대를 점점 더 추진해 미국을 제치고 세계의 챔피언국이 된다는 내셔널리스틱한 것이었다. 이 책이 출간됐을 당시 관료2대 (官二代, 관료의 아이는 관료), 부자2대(富二代, 부자 집 아이는 부자)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중국 사회의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현재는 이에 더해 홍2대 (紅二代, 혁명가의 자녀)가 극성을 부리고 있지만, 이 홍2대는 (혁명가 부모와 달리) 규제를 피해 개인 이익을 확보하는 계급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덩샤오핑 시대에는 아무리 가난한 농민일지라도 열심히 일하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Chinese Dream이 있었다. 이 Chinese Dream이 사라지고 구멍 뚫린 가슴에 주입된 것이 ‘중국몽(China Dream)’이었다. 이것은 중국 민족의 꿈, 중국 국가의 꿈이며, 개인의 꿈은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민족이나 국가가 대신 꿈을 실현한다면, 개인도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설파하는 내용이다.

역사를 되돌아보고 싶다.

2. 중국의 자기 인식 및 발전 전략의 발전 과정

#마오쩌둥 시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주석

마오쩌둥
“중국은 영국 추월해 미국 따라잡을 것”

애초에 중국은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고 어떻게 발전전략을 전개해왔을까?

마오쩌둥 시대에는 일본의 침략도 있었고 또 엄청난 내전도 있었기 때문에 폐허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은 “정치적, 인구상 대국이지만 경제적으로 소국”이라고 인식했다. 처음에는 소련의 원조를 받았으나 스탈린이 죽고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난 뒤 1957년에 마오쩌둥은 2차 해외 방문으로 다시 러시아를 찾았다. 마오쩌둥은 흐루시초프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중국은 영국을 추월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과 사이가 벌어졌고 어느 쪽이 혁명의 본가인가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이 같은 1960년대 초의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3개의 세계론’이라는 것으로 세계 질서를 이해했다. 첫 번째가 미소 초강대국, 두 번째가 유럽의 선진 공업국, 세 번째는 개발도상국으로 중국은 당연히 세 번째에 위치했다. 중국은 개발도상국이면서 미국 소련과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화궈펑이 뒤를 이었지만, 화궈펑과 권력 투쟁에 이기고 집권한 것이 덩샤오핑이다.

#덩샤오핑 시대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Southern Tour) 당시의 덩샤오핑 주석

프랑스 체류 경험 덩샤오핑
마오와 달리 ‘기술 중시’ 입장 선명

마오쩌둥 시대 말기인 1975년에는 덩샤오핑이 국가 운영의 중심에 있었다. 덩은 문화대혁명으로 한번 실각했지만 1973년에 부활했다. 마오쩌둥은 당시 2인자인 저우언라이를 비판하고 종국에는 당의 일상 업무를 덩샤오핑에 맡겼다. 덩은 “중국은 대국이지만 엄청나게 가난한 나라다, 명(名에) 실(實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지방에 큰 권한을 부여하여 발전시키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마오쩌둥과의 큰 차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었다. 덩샤오핑은 젊은 시절 프랑스에 체류하며 공장에서 일하기도 한 경험이 있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머리는 매우 좋았지만 수학 성적만큼은 좋지 않았다.

덩샤오핑 목표는
21세기 중반 중진국 되는 것

당시 중국의 과학기술 수준은 일반적으로 낮았고, 문화대혁명이 더욱 이를 망가뜨렸다. 재빨리 기술을 습득하려면 외국에서 사오는 수 밖에 없고, 그러려면 외화가 필요했다. 결국 외국에 물건을 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이 팔 수 있는 물건은 천연자원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문화혁명) 4인방의 역린을 건드려 자원을 파는 것은 국토를 파는 것과 같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덩샤오핑은 다시 실각했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후 덩은 부활하여 대국이라는 이름(名)에 걸맞은 열매(實)를 어떻게 열리게 할 것인가라고 할 때에, 나라를 열고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해외로부터 투자도 끌어들이는 정책을 실시했다. 당시 목표는 21세기 중반에 중진국 경제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보자면 이는 꽤 조심스러운 목표이지만, 중국이 고도성장을 이렇게 오래 이어갈 줄은 덩샤오핑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임을 보여준다.

30여 년 전인 1989년에 일어난 6.4톈안먼 사태로 중국은 경제제재를 받았다. 이때 덩샤오핑이 외교에 관한 유훈으로 남긴 것이 바로 ‘도광양회’였다. 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려, 협조적이고 유화적인 외교를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덩은 제3세계의 리더가 되자와 같은 생각은 해서 안된다고 했다.

#장쩌민 시대

냉전 종식이 中에 행운
걸프전도 장쩌민에 우호적 환경 만들어

장쩌민은 이 유훈을 따라 나아갔지만 큰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냉전이 끝나 북쪽(소련)의 위협을 생각하지 않고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걸프전쟁에서 미국은 군사혁명(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의 성과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장쩌민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엔지니어이며, 제1기계공업부 출신이며, 전자공업부장(장관)을 맡기도 했다. 장쩌민은 인민해방군의 기계화, 정보화를 추진하는데 최적의 리더였다. 그에게는 군을 억제하고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한 좋은 환경이었다. 1999년 확대중앙군사위원회에서 “나는 처음부터 가능한 한 국방비를 늘리라는 지시를 내려 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높은 증가율에 따른 국방비의 증가가 장쩌민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교묘하게 국제 위상 높여

(당시) 하나의 논쟁거리는 앞으로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였다. 일초다강(一超多强)으로 될지, 아니면 다극화로 진행될지에 대해 21세기까지 논쟁이 있었다. 결론은 당분간 일초다강이 유지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는데, 중국은 여러 강국 중 하나가 되었다고 자각하였다. 자기인식의 중요한 변화였다. 덩샤오핑도 ‘남순강화’를 통해 “지금 경제발전의 기회가 왔다, 이를 놓치면 안된다”라고 발언하고 개혁개방을 더 높은 수준으로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일본이 지원하고 WTO에도 가입할 수 있게 됨으로써 중국은 성장궤도에 올라섰다.

하나의 사건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였다. 이때 중국은 위안화 평가절하를 하지 않았다. 주룽지는 이를 외교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해 런던에서 열린 국제회의 등에서 “중국에는 친구나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돕는다는 말이 있다”는 등의 말을 해서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 국내에서는 블랙마켓을 통해 위안화를 외화로 바꾸기 시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중국인들은 돈에 민감해서 당시 조금이라도 위안화를 평가절하한다는 낌새를 정부가 보이면 곧장 큰 파동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당시 중국의 4대 상업은행의 부실채권율은 27퍼센트에 이르렀다는 중앙정책연구실의 연구가 있었다. 이 수치는 동남아 여타 국가들의 불량 채권율 보다 높은 것이었다. 어떻게든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중국 당국은 알고 있었으며 가을에 첫 금융공작회의를 연다는 결정이 그해 이른 단계에서 내려졌다. 때마침 금융위기가 터지자 당당하게 평가절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이를 외교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것이 진상이다. 이 일로 중국은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이 처음으로 국제사회로부터 갈채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은 6.4 톈안먼 사건도 있어서 비판만 받아 온 것이 이때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또,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미국과 유럽을 포함해 다른 나라는 어디도 도와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제안했던 AMF(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이 좌절되면서 아시아의 연대의식이 높아졌다. 중국은 그동안 자신이 주도권을 잃을지도 모르는 지역주의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자신감이 생기면서 지역의 운명 공동체를 통해서 이익을 지킨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와 ASEAN+3등 아시아 지역의 다자간 협력체에 적극적으로 되어 갔다. 이는 중국이 강대국이 되는 것에 대한 위협론을 방지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했다.

99년 베오그라드 中 대사관 피폭사건
중국 외교에 각성 계기 돼

또 하나의 사건은 1999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중국 대사관 폭격 사건이었다. 중국은 이를 계기로 미국은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미중 관계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는 생각을 새로 하게 된 것이다. 당시는 아직 일초다강의 정세여서 한 국가가 미국에 대항하면 나머지 다른 나라는 모두 미국에 복종하는 형세였다. 그렇게 되면 중국의 활동 공간이 없어진다. 그래서 주변에 동료를 만들어 미국과 싸웠을 때에도 자신의 활동 공간을 남겨두기 위해 지역주의에 나서게 된 것이 1990년대 말 이후였다.

#후진타오

2011년 미국을 방문해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 후진타오 주석

2008 국제금융위기 계기로
일거에 ‘세계경제 기관차’로 올라서

2002년 후진타오가 집권했으나 장쩌민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남았다. 후진타오 시대는 장쩌민이 아직도 건재해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개혁을 방해하는 일이 많았다는 인상이 있다. 두 개의 중앙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후진타오는 끝내 중앙 지도부의 핵심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 무렵에 일어난 국제적 대사건이 2008년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였다. 국내에서는 원자바오가 긴축하면서 개혁을 진행하려 했지만 이에 대한 저항이 있어 재정금융 완화 목소리가 강했다. 결국 성장률이 일정 이하가 되면 적극재정으로 전환한다는 타협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하여 일거에 적극정책으로 전환되었다. 4조 위안의 내수 진작책에 의해 금융 위기에서 일찍 탈출하였고 G20정상회의에서 중국은 세계 경제를 이끄는 새로운 기관차로 추앙받는 위치로 갑자기 올라섰다. 2008년에서 2009년 경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는 마침 후진타오 집권 제2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는데 제2 집권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당내 불일치가 표면화됐다. 무엇인가 하면 예를 들어 경제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중국 모델은 존재하는 것인가? 중국 모델은 이제 세계 발전 모델이 된 것인가 하는 논란이 국내에서 널리 퍼진 것이다. 이에 대해 냉정한 의견도 물론 있었다. 확실히 생활수준도 높아졌고 국력도 붙었다. 국제 위상의 고조는 아편전쟁 이래 처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잘난 척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이야기였다. 한 꺼풀 벗기면 심한 소득격차와 부정부패, 환경오염이 있는데, 이런 것은 개도국밖에 없는 현상이 아니냐는 중국 모델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2009년에 도광양회 접고
유소작위로 전환

이 논쟁은 계속되었지만 점차 중국 모델론이 우세해져 갔다. 이는 기본적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하여, 도광양회는 이미 낡았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는 외교 논쟁도 시작됐다. 도광양회는 나라가 약할 때의 논리다, 지금은 강해졌으니 확실히 자기주장을 해서 국익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2009년에 이르러서는 후진타오도 용어를 바꾸는 것에 동의한다. “도광양회 유소작위”에서 “견지도광양회, 적극유소작위(堅持韜光養晦、積極有所作爲)”로 바뀌었다. 유소작위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히 자기주장을 해야 한다는 뜻인데 논쟁을 거쳐 이를 “적극적으로 한다”로 변화시킨 점이 중요하다. 논쟁이 있을 경우, 표면상으로는 양쪽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 중국 공산당의 방식이다. 도광양회를 견지한다고는 했지만, 거기에 무게는 없다. 실제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중국의 행동은 적극적으로 변했다.

후진타오 미국서 “인권은 보편가치” 발언
신화사가 한줄도 보도하지 않아

또 하나는 보편적 가치 논쟁이다. 그때까지 인권은 보편적인 것으로 중국도 헌법에 적혀 있다고 중국 공산당은 설명해 왔다. 덩샤오핑은 이를 곧장 모든 것이 실현된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도상국이기 때문에 점차 실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2008년쯤 되자 보편적 가치는 없다는 주장이 선전 부문 등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인민일보에도 그런 논의가 나왔다. 중국사회과학원 원장까지 그런 말을 하게 된다. 인권은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서구의 가치이며 서구인이 우리에게 그것을 떠넘기기 위해 보편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이지, 이를 수용한다면 중국적 가치는 부정되게 된다, 그러므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2011년 1월 후진타오가 미국을 방문하였다. 오바마와 공동 기자 회견 석상에서 후진타오는 인권은 보편성이 있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신화사는 기자 회견을 한 것은 보도하고, 그 사진도 내보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후진타오 시대 후반은 당내가 정리되지 않아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시대였다. 장쩌민과의 권력 다툼 외에도 국제 협조적인 움직임과 내셔널리즘적인 움직임이 경쟁하는 상황이었다.

#시진핑

‘보편 가치 없다’ ‘중국 모델 있다’
시진핑이 집권 초부터 분명히 해

(후진타오 시절의 영향) 때문에 시진핑이 처음 나왔을 때, 좌우 대립 속에 흔들리지 않을까, 권력 기반으로서의 인맥도 한정되어 있어 약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시진핑은 내셔널리즘을 강조하고 중국 모델은 있다, 보편적 가치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더해 권력기반을 교묘하게 다졌다. 그의 자기 PR은 ‘마오쩌둥은 중국을 일으켜 세웠다, 덩샤오핑은 중국을 풍요롭게 했다, 자신은 중국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도광양회에서 “분발유위”(奮發有爲, 발분해서 해야 할 일을 함)로 슬로건도 바뀌었다.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에 관한 자기 인식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글로벌 대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평양에는 미국과 중국을 함께 받아들일만한 넓은 공간이 있다”는 말이 이를 상징한다. 하지만 미국과 공존공영하는 신형 대국 관계 구축은 좌절되었고, 일대일로를 제창하여 나라의 서쪽으로 발전의 벡터를 바꾸려 한다. 여기서도 일대일로 정상회담을 소집하는 등 계통적인 세계질서의 정점에 서려는 자세가 뚜렷해졌다.

시진핑 지도부에
공산당 정통성 상실 불안감 있어

2년 전 당 대회에서는 “중국은 갈수록 세계 무대의 중앙에 다가가고 있다”라고 명언했다. 미국 일각에서는 이를 미국의 패권에 대한 도전장이라고 인식한 듯 하다. 확실히, 중국의 일부에는 자신감 과잉이라고 할 정도로 강경한 사람들이 있다. 시진핑은 중국의 노선, 이론, 제도, 문화라는 네 가지에 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할수록, 내심 불안에 시달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홍콩 시민의 운동에 대해 홍콩 마카오 판공실 주임은 “운동의 성질이 컬러(이념) 혁명의 그것으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이는 아마도 시진핑 자신의 판단일 것이다.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고 공산당 정권 지배의 정통성이 상실될 우려를 항상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패권국은 교체하는가

중국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中은 부상하는 국가, 美는 쇠퇴하는 국가’
너무 선전한 것 아닌가

중국이 미국을 밀어내고 패권을 쥐게 될지 어떨지를 대담하게 예측하자면, 결론부터 말해 당분간 교체는 없다. 2005년에서 2006년 즈음 내가 미국에 체류할 때는 아직 일초다강의 상태였다. 언제까지 패권은 계속될 수 없다는 인식은 일부 미국 지식인들에게 있었지만 가능한 한 그 시기를 미루자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부터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졌다. 중국이 그 후 ‘중국은 부상하는 국가(rising power)이고 미국은 쇠퇴하는 국가(declining power)’라고 너무 선전한 감이 있다. 많은 미국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신감을 잃었고 그 결과로 현재와 같이 중국에 대한 강한 반발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근대화 진행될수록 공산당 할 일 없어져
공산당 권력 상대화 되고 있어

양국 경제 성장의 조건을 비교해 보면, 중국은 지금까지 개발 독재로 성공해 왔다. 정보 통제도 할 수 있고 인구 규모도 플러스로 작용했다. 그러나 어느 단계를 지나면 개발독재는 발목을 잡는다. 시진핑에게 개혁을 추진하는 마법 지팡이는 없다. 시진핑은 2년 전 당 대회에서 발전의 새로운 방안으로서 당의 영도 강화밖에 말하지 않았다. 중국어로 영도(領導)란 지도보다 강한 말로 지휘명령권을 갖는 리더십을 말한다. 그러나 당의 영도 강화와 근대화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모순이 있다. 덩샤오핑은 중국을 근대화하려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화란 무엇인가? 하드웨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근대화에는 사회의 변화도 포함된다. 도시화, 제도화, 법제화, 경제면에서는 시장화도 있다. 이것들이 진행될수록 공산당은 할 일이 없어진다. 하나하나 공산당의 지령이 없어도 사회는 제도나 시장을 통해 운영되게 되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권력이 점점 상대화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근대화의 숙명이다. 그러면 독재권력의 약화를 걱정하게 되고, 때때로 나사를 감아 사회통제를 강화한다. 따라서 당의 영도에 집착하는 한 근대화와 갈등을 가중시킨다. 지금 바로 그런 상황에 있다.

중국인들도 체제변혁 불가피 알아
조만간 큰 혼란 두려워 해

정치체제의 장래라는 문제도 있다. 중국의 많은 사람들도 조만간 체제 변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이 어떤 프로세스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큰 혼란이 있을 것을 많은 중국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게다가 고령화가 큰 문제다. 또, 그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경제 성장을 해나가려면 천연자원이 필요한데 이것이 없다. 물도 없다. 환경오염도, 최근 무리하게 공장을 멈추고 조금 공기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 동맹국은 없다. 그리고 국제 기축통화가 없다.

1월 8일 이라크 미군 기지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공격과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트럼프 대통령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美, 오만하다 말 들어도 어쩔 수 없어

이에 대해 미국의 이점은 정반대여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여서 정치체제 전환의 리스크가 없다. 이민이 오기 때문에 고령화의 문제도 없다. 천연자원은 풍부하고, 자연도 풍부하며, 환경문제는 잘 느끼지 못한다.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가졌다. 이것들은 대단한 강점이다.

미국의 결점은 이념은 있지만 (상황과 상대에 따라) 이중으로 적용되는 기준이며 많은 나라들이 미국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 부패하고, 오만하다(arrogant)라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확실히 미국 역시 어떤 의미에서 정치가 문제다. 미국 내 분열의 문제를 어떻게 정치가 해결해 나갈 것인가? 이것은 미국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미중의 장래를 비교해 보면 단연 미국이 유리하다’라는 것이 중국 전문가가 양국을 저울질했을 때의 전망이다.

[일본어 원문]
[영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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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의 對中 인식 ③] 韓·日 등 美 동맹국은 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와타나베 츠네오 (渡部恒雄, 사사가와평화재단 수석연구원)

[여시재 인사이트 / 日의 對中인식 ②] “중국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문제 해결이 시급”

다나카 오사무 (田中 修, 일본무역진흥기구 아시아경제연구소 상석주임연구원), 감수∙일본 안전보장외교정책연구회